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징비하지 못한 자에게 역사는 결코 자비롭지 않다."


침략군에 맞설 힘이 없었던 나라, 자신의 땅을 전쟁마당으로 내줄 수밖에 없었던 나라, 왜와 명의 싸움에 제 나라 백성이 죽고, 제 나라 가축과 곡식이 강탈당하는데도, 도망가기 바쁜 왕과 신하들,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한 장수와 무기조차 없는 병졸들, 조선은 그런 나라였다.


율곡이 상소문에서 송곳처럼 지적한 대로 조선은 ‘오랫동안 고치지 않고 방치해둔 만간대하萬間大廈’로 기둥을 바꾸면 서까래가 내려앉고, 지붕을 고치면 벽이 무너지는 그런 형국이었다.


그렇게 나라라고 말할 수 없는 나라였던 조선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조선분할을 노리는 침략자 왜와 조선을 요동방어 울타리로 삼으려는 명으로부터 처절하게 유린당해야 했다. 뼈아프고 부끄러운 역사이지만 이것은 가감 없는 임진왜란의 진실이다.


이 책.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는 그 치욕스런 역사의 현장에서 전시수상(영의정)과 군 최고사령관 격인 도체찰사로서 조선 자강과 조선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전쟁을 치러낸 류성룡의 리더십을 냉철하고 뜨겁게 재조명한다.


전쟁이 끝나고 숭명파에 의해 재상에서 파직당한 그는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 정황, 대안들을 기록해 동시대인에게는 조정의 여러 실책들을 반성하는 ‘징계의 채찍’으로, 후손에게는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기 위해 앞날을 준비하라는 ‘경계의 교훈’을 남기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다.


그것이 바로 《징비록》이다.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한 강토를 피폐하게 만든 참혹했던 임진왜란에 대해 가장 사실적이고 가장 생생한 체험적 고통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망각증이 도져 오직 망한 명나라만 그리워하며 아느니 중국 인물이며 읽느니 중국 역사였다. 마치 제갈량의 출사표를 들먹여야 충신인 양 국가 개념도 역사의식도 없이 숭명 사상에 사로잡혀 자강하지 못했다.


당연히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역사적 체험인 '징비록'을 무슨 뜻인지 외면한 결과, 300년 후 역사는 재현된다. 임진왜란의 판박이처럼 조선을 놓고 흥정한 청일전쟁, 러일전쟁으로 또다시 국토가 유린되고 나서, 마침내는 저항 한번 못해보고 송두리째 나라를 일본에 넘겨야 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그래도 류성룡이 있었고 이순신이 있었다. 그 둘이 없는 경술년은 짓밟힘을 넘어 노예의 삶을 받아들여야 했다. 과거를 잊은 조선에게 역사는 결코 자비롭지 않았다.


경술국치로부터 104년이 지난 오늘, 남북분단의 냉혹한 현실을 앞에 둔 우리에게 여든의 노학자는 오늘을 징비懲毖하며 묻고 있다.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통일된 미래도 우리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 시대가 다시 류성룡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이 책의 저자 송복은 정치사회학자답게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를 '징비록' 1, 2권 외에 '진사록', '서애전서'에 나오는 보고서 형식의 상소문과 예하 기관에 전달한 공문의 일종인 문이 등 총 549건의 자료를 빠짐없이 분석하여 정치사에 매몰되어 가려진 임진왜란 당시 사회경제사의 실상을 아프도록 날카롭게 드러낸다.


저자는 임진왜란을 류성룡의 두 가지 전쟁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하나는 명?왜의 4년에 걸친 강화협상을 통한 조선분할획책을 막아내는 분할저지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식량을 모아 명군과 조선군에 군량을 대는 군량전쟁이 그것이다. 그 두 측면 속에서 당대 최고의 전략가이자 경세가였던 류성룡의 리더십을 재조명해 오늘날의 리더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류성룡은 확실히 조선조 500년을 대표할 정치리더로서 손색이 없다. 조선 조정 신하들 중 문제의 실상과 실체를 날카롭게 분석한 사람은 더러 있었지만 당위적이고 윤리적인 방법을 제시할 때 그는 어떤 상황과 문제에 대면해서도 알맞은 방법론을 가지고 있었다.


명 황제의 명命으로 조선을 분할하겠다고 압박하는 횡포한 명군 장수들을 대할 때는 강직함보다 온유하고 부드러움으로 그들을 눌렀다. 군량과 군마의 먹이를 구할 수 없어 군량전쟁의 열세에 놓였을 때도 전쟁사에서 누구나 쓰던 가장 손쉬운 방법인 백성을 약탈하는 비인간적인 방법을 절대 쓰지 않았다. 또한 그는 최고의 권좌에 있으면서도 권력을 이념으로 당파를 만들거나 개인화하지 않았다.


그는 경세가로서 지극히 실용적인 리더십의 진면목을 발휘한다. 그 탁월한 예가 모두가 군량조달을 위해 전통적인 방법인 전세 작미 둔전에 매달려 있는 상황에서 류성룡은 재력 있는 중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군량을 바치도록 하는 모속과 실직 없는 관직을 팔아 충성심과 군량을 동시에 해결한 공명첩, 그리고 무역을 통해 곡식을 조달하는 무속이라는 세 가지 방법을 창안하여 군량문제를 해결해낸다.


여기에 군편제와 군기능을 혁신한 군개혁의 대설계 기무10조는 그를 왜 조선조 최고의 ‘재상’이자 전략가라 평가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더불어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절묘한 인사, 즉 문신인 권율을 육군 장군에 발탁한 것과 육군으로 경력을 쌓아 온 이순신을 수군에 천거하여 임진왜란의 국난을 극복한 일화는 가히 류성룡 리더십의 압권이라 하겠다.


특히, 이순신의 7단계나 뛰어넘는 파격 인사는 이후 류성룡 자신을 탄핵하는 빌미가 되기도 하지만 개의치 않음으로써 무사안일·복지부동·적당주의 타성에 젖어 있는 공직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이 책을 읽다보면 ‘백성이 즐겁게 따르게 해야 한다’는 그의 리더십 신념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백성은 온몸을 바치는 리더에게 감동하는 법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의 모습이다.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류성룡은 우리나라 사람이 일하는 모습을 '창황실조'라 요약했다. 창황실조는 일에 당면해서 허둥대고 당황하다가 일의 두서를 찾지 못하고 일의 조리를 잃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즉, 전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워 차곡차곡 일을 진행시키지 않고, 서두르기만 하다가 중도 폐지하는 것이다. 이는 2년 후인 1595년의 보고서에 더 절실히 드러난다.


'우리나라에서 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 오래 견뎌내는 것이 없습니다. 짧으면 한두 달이고, 길어봐야 한 해를 넘기지 못해 중도에서 폐지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의지가 굳게 서 있지 못하고 계획이 먼저 정해져 있지 않아, 이리 저리 옮겨서 일이 귀착할 곳이 없습니다. 아침에는 갑이란 사람의 말을 좇아서 일을 진행하다가, 저녁에는 을이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일을 폐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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