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이 책은 17세기를 대표하는 두 천재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짧은 만남을 중심으로 두 철학자의 파란만장한 삶과 사상을 한 편의 이야기로 창조해낸 철학적 모험담이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가 필생의 주제로 삼아 분투했던 고민의 핵심을 쉽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철학 교양서이자, 역사의 낡은 책장 속에 박제된 두 인물을 생생한 현실의 인간으로 살려낸 평전이다.

 

저자 매튜 스튜어트는 탄탄한 철학 지식과 뛰어난 이야기꾼의 재능을 발휘하여 실제로 일어났던 철학사의 결정적인 한 장면을 마치 한 편의 추리 소설처럼 엮어낸다. 두 철학자의 삶과 역사와 철학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인문학적 호기심과 철학적 재미를 두루 충족시켜주며, 몹시 난해한 개념으로 알려진 스피노자의 ‘신(God)=자연’과 라이프니츠의 ‘모나드(monad)’ 개념을 더없이 쉽고 명쾌하게 독자에게 설명해준다.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1676년 11월 찬바람이 불던 어느 가을날, 젊은 남자가 헤이그에 도착해 운하 옆 작은 벽돌집 2층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진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도회풍의 그 젊은 남자는 수수한 옷차림을 한 중년의 남자와 마주앉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만 눈빛만은 한없이 투명하고 깊어서 세상의 비밀을 다 꿰뚫어보는 듯한 남자였다.

 

한 사람은 미적분의 고안자이고 마인츠의 전직 추밀고문관이며, 얼마 전 하노버 공작의 신임 사서로 임명된 서른 살의 야심만만한 만능 철학자 라이프니츠였다. 그 철학자를 맞아들인 다른 남자는 당대의 가장 위험한 두뇌로 악명을 떨침과 동시에 탁월한 지성으로 유럽 지식 세계를 전율시킨 마흔네 살의 불온한 은둔자 스피노자였다.

 

스피노자를 만나는 일은 그 자체로 전도유망한 삶이 끝장날 수 있는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숨긴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에게 문을 열어주었으며, 라이프니츠는 왜 그토록 위험한 도전을 감행했을까? 철학사의 가장 은밀하고도 위험한 만남에서 두 천재 철학자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것일까?

 

스피노자는 이중으로 추방당한 자였다. 유대 공동체에서는 이단자로 몰려 파문당했고 기독교 세계에서는 무신론자 유대인으로 낙인찍혔다. “쇠사슬로 묶어놓고 몽둥이 매질을 해야 마땅한 미치광이 악한”이라는 비난이 그를 따라다녔다. 암살 위협까지 받게 되자 그는 고향 암스테르담을 떠나 헤이그로 숨어들었다. 이 이중 망명자는 하숙집 다락방에서 낮에는 광학용 렌즈를 갈고 닦고, 밤에는 촛불 아래서 자신의 철학 체계를 갈고 닦았다. 그는 억압적인 신권정체 타도와 자유로운 민주정체 수립을 주장한 근대 최초의 정치 철학자이자 급진 혁명가였다. 이 사유의 전복자는 지극히 청렴하고 겸손하고 조용한 삶을 살았다.

 

라이프니츠는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을 품은 ‘옴니마니아(omnimania)’였다. 철학사에서 가장 다재다능한 천재로 꼽히는 라이프니츠는 철학, 수학, 물리학, 기계 기술, 지리학, 법학, 어학에 두루 능통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정도가 그에게 비견될 만한 천재였다. 그는 유럽의 평화를 위해 프랑스 루이 14세에게 제2의 십자군 원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사상의 중재자가 되겠다는 거대한 야심을 품었고, 무너져 가는 기독교 세계를 재통합하는 ‘기독교 국가’ 건설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의 야심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만나 격하게 흔들렸다.

 

저자는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삶과 사상을 촘촘하게 엮어 역사 소설과 같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직조한다. 화려하게 치장한 젊은 궁정인은 검소한 다락방 철학자와 격론을 벌인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재적 문제의식으로 생동한다. 17세기는 철학하는 것이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태로운 시대였으며 동시에 그 위태로운 시대를 별처럼 빛냈던 불온한 천재들의 시대였다. 이 잘 짜인 철학적 모험담은 그 17세기를 강타한 천재적 사상들의 대결을 한 편의 드라마로 되살려낸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만남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나?

 

구름 낀 오후가 덜거덕거리는 창유리를 뚫고 집안으로 스며든다. 밖에서는, 가을 낙엽들이 도시의 질서에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으며 스쳐 지나간다. 위층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삐걱거리는 마루청 위에서 다투고 우는 소리를 내며 돌아다닌다. 묽은 닭고기 수프의 따뜻한 냄새가 방안의 공기를 채운다. 파빌륜스흐라흐트에 있는 그 집 거실에서 두 사람이 작은 나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한 사람은 젊음과 정력으로 가득 차 있으며, 유행하는 옷차림을 하고 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가발은 이마 위로 불룩 솟아 있다가 아마도 11월의 거센 바람을 맞아 살짝 흐트러졌을 것이다. 다른 한 사람은 나이가 더 들었고, 간편한 셔츠를 입었으며, 그가 가진 다섯 장의 손수건 중 하나에다 너무 자주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상상해보건대, 이런 모습이 아마도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가 1676년에 헤이그에서 만났을 때의 풍경이 아니었을까.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두 철학자의 만남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헤이그를 떠난 후 라이프니츠는 만남 자체를 부인하거나 애써 의미를 축소하려 했다. 라이프니츠는 헤이그를 거쳐 지나가는 길에 동료 철학자에게 잠시 들렀던 것뿐이라고 마지못해 둘러댔다. 그 여행에서 누구의 무슨 철학을 어떻게 알게 되었든지 간에 자기는 그것이 너무나 형편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반박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헤이그의 은둔한 혁명가 대 하노버의 젊은 궁정대신


스피노자는 초월적인 인격신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유대 공동체에서 파문당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 세계에서 ‘사악한 무신론자’로 낙인찍힌 위험한 철학자였다. 1670년에 성서를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신권정체 타도와 민주정체를 주장하는 《신학정치론》을 발표한 뒤로 스피노자는 매우 심각한 박해의 위협에 시달렸다. 늘 신변의 안전을 염려해야 했던 스피노자는 서신 왕래를 할 때 가시 돋친 장미와 다음의 한 단어가 새겨진 도장 반지를 활용했다. 그것은 바로 ‘Caute’, 즉 ‘조심’이었다.

 

1676년 가을이 가까워 왔을 무렵,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는 신변의 안전을 염려해야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스피노자와 가까웠던 한 동료가 얼마 전에 처형되었으며, 다른 동료는 감옥에서 죽었다. 결정적인 저술인《에티카(Ethica)》를 출간하려는 스피노자의 노력은 법정 고발의 위협 속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의 한 유력한 신학자는 스피노자를 가리켜 “이 시대에 가장 불경스럽고 가장 위험한 자”라고 비난했다. 권세 높은 어떤 주교는 “쇠사슬로 묶어놓고 몽둥이 매질을 해야 마땅한 미치광이 악한”이라고 스피노자를 비난했다. ― 프롤로그 11쪽에서

 라이프니츠에게도 스피노자와의 만남은 독일과 프랑스의 궁정을 넘나들며 화려한 출세의 사다리를 오르고 있던 자신의 경력을 단번에 끝장낼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당시 서른 살에 불과했던 라이프니츠는 이미 유럽이 배출한 최후의 만능 천재임을 만천하에 공언할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었다. 스물한 살에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벌써 수학 분야에서 미적분학을 고안해낸 상태였으며, 화학, 시각(時刻) 측정, 지질학, 역사 편찬, 법학, 언어학, 광학(光學), 철학, 물리학, 시학, 정치 이론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자신이 공헌한 업적들의 긴 목록을 일찌감치 채워 두고 있었다. 그런데 왜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자리는 물론이고 목숨까지 위태롭게 만들지도 모를 위험한 모험, ‘불경한 이단자’ 스피노자를 찾아가는 모험을 감행한 것일까?

 

단 한 장의 메모에 담긴 비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만남을 증명하는 직접적인 증거는 단 한 장의 종이뿐이다. 1890년에 처음 출간된 문제의 그 증거는 ‘가장 완벽한 존재가 존재한다’라는 제목으로 라이프니츠가 쓴 한 장짜리 문건이다. 라이프니츠가 그 종이의 여백에 적어놓은 기록에 따르면,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의 눈앞에서 그 글을 직접 읽어주었다고 한다. 그 한 장의 종이에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존재, 즉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들의 토론 주제는 결국 이 한 단어로 압축된다. 바로 ‘신’이다. 스피노자는 기독교의 하느님으로 대표되는 초월적인 인격신에게 이제 그만 인류에게서 떠날 것을 요구한다. 흥분해서 날뛰는 광신자들과는 달리, 당대에 스피노자와 견줄 수 있는 지성의 소유자 라이프니츠만이 스피노자의 논증 속에서 족쇄에서 풀려난 근대 이성의 종착점이 어디가 될 것인지, 또 그러한 결말이 어떤 파괴력을 발휘할지 절절히 인식할 수 있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세상을 뒤엎을 무서운 철학이다. 신의 퇴출은 그간 신을 핑계로 자유를 억압해 온 구체제의 전복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신이 없는 세상에서 이성을 지닌 인간들을 위한 철학이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와의 은밀한 만남에서 그의 형이상학에 담긴 이 무시무시한 정치적 함의를 시작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읽어낸 것이다. 신이 무너지면, 결국 그간 쌓아올린 서양 문명의 질서도 무너진다. 스피노자가 유배시킨 신을 다시 모셔 오라!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근대적 이성으로 무장한 인간들이 자유를 갈망하는 세상에서 신의 지위를 복원하기 위한 철학이다. 말 그대로 이 두 사람의 손에 신의 운명이 달린 것이다.

 

암스테르담의 천재 소년, 공공의 적이 되다

 

스피노자는 근대 철학자들 중 현대 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철학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수많은 철학자들이 스피노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헤겔은 “스피노자의 추종자가 된다는 것은 모든 철학의 필수적인 출발점이다.”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다음과 같은 유명한 답변을 내놓았다. “나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습니다.”


스피노자는 평생 지극히 검소하고 조용한 삶을 살면서 오로지 자신의 철학 체계를 갈고 닦는 일에 전념했고, 그런 점에서 오늘날 스피노자는 진정한 철학자의 표본으로 불린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생활 방식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그렇게 단순한 인간이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친구들과 방문객들은 그에게서 수수께끼 같은 면모를 심심치 않게 발견하곤 했다. 바로 신중함과 당돌함, 겸손함과 오만함, 그리고 냉철한 논리와 반항적인 열정이 기묘하게 뒤섞인 모습이었다.

 

파문당한 천재


바뤼흐 스피노자는 1632년 11월 24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부유한 포르투갈계 유대인 무역상 미카엘 스피노자의 셋째 아이로 태어났다. 포르투갈식 이름인 ‘벤투’라고 불린 스피노자는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학교에서 이례적으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신동으로 주목받았다.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하지 않았다면, 스피노자는 랍비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서양 철학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1653년 아버지가 죽은 뒤 스피노자는 무역상이 되어 집안을 책임지게 되었다. 무역상 일을 하면서 그는 자신을 새로운 배움의 세계로 인도한 프란스 판 덴 엔던과 만나게 되었고 여러 명의 평생의 친구들을 얻었다. 라틴어 학자이자, 급진적인 민주주의 투사였던 판 덴 엔던에게서 스피노자는 라틴어를 배웠고 데카르트 철학을 만났다.

 

어느 모로 보든, 벤투는 배우고자 하는 그야말로 무자비한 열정을 드러냈다. 그가 열정적으로 알고 싶던 대상은 바로 위대한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Ren? Descartes)였다. 당시 데카르트의 사상은 전 유럽의 지식계에서 온통 논쟁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고 있었다. …… 벤투는 곧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얕볼 수 없는 해설자이자 비판자로서 명성을 쌓았다. …… 벤투는 자신의 좌우명으로 그 프랑스 거장의 일성을 받아들였다. “훌륭하고 견고한 이유들로 입증된 것이 아닌 것은 어떤 것도 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벤투가 이 좌우명이 데카르트 자신의 철학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경의 내용 대부분을 배제하게 된다고 결론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유대 공동체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다. 그가 모세5경이 실은 인간이 쓴 것이며, 영혼은 육체와 함께 죽고, 신은 물질 덩어리라고 믿는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1656년 스피노자의 이단적 생각을 소문으로 접한 유대 공동체 지도자들은 청문회를 열어 그를 파문한다. 스피노자의 파문은 그때까지 이루어진 모든 파문의 형태 가운데 가장 가혹한 것이었다. 심지어 가족과도 말을 하거나 식사를 할 수도 없었다. 스물세 살에 유대 공동체에서 파문당한 스피노자는 이중의 망명자가 되었다. 유대인들에게 그는 불경한 이단자였고, 기독교인들에게 그는 무신론자 유대인이었다.

 

“그의 철학은 그렇게 나쁜데 어떻게 그의 삶은 그리도 훌륭할 수 있나?”


파문당한 뒤 스피노자는 자기 철학의 유일한 목적을 “부단하고 지고하며 영구불변한 행복”을 성취하는 데 두었다. 그 행복은 오로지 ‘사유하는 삶’을 통해 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물질적인 쾌락은 불필요했다. 다만 철학자에게도 건강을 유지할 정도의 돈은 필요했고, 이 삶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그는 광학용 렌즈를 갈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스피노자는 낮에는 현미경과 망원경을 위한 렌즈를 갈고 닦았고, 밤에는 촛불 아래서 자신의 형이상학 체계를 갈고 닦았다.


늘 경건하고 검소하며 조용한 삶의 방식은 그를 이단자, 무신론자로 비난하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17세기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무신론자는 퇴폐적인 인간이었다. 인간을 심판하는 섭리의 신을 믿지 않는 비(非)신앙인은 모든 형태의 감각적인 자극에 탐닉하고, 닥치는 대로 속이고, 사기 치고, 그러다가 마침내 전능자에게 붙잡혀 괴로운 죽음을 당하는 신세가 될 것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추론에서 스피노자는 예외였다.

 

17세기의 모든 해석자들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신에 관한 전통적인 생각들을 모두 거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이단자였다. 그렇지만 그의 삶의 방식은 검소했고, 명백히 악행이란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그 철학자는 살아 있는 모순 어법 같았다. 그는 금욕적인 관능주의자였고, 정신적인 유물론자였고, 사교성 있는 은둔자였으며, 세속의 성인이었다. 비판자들은 묻는다. 그의 철학은 그렇게 나쁜데 어떻게 그의 삶은 그리도 훌륭할 수 있단 말인가? ― 3장 성스러운 유물론자 129쪽에서

 

“그 불온한 서적이 출간되는 것을 막아라.”


1677년 2월 21일 스피노자가 지병인 폐 질환으로 불과 마흔네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스피노자의 죽음이 몰고 온 가장 큰 파장은 그의 유고집 출간과 관련된 일이었다. 스피노자의 유언에 따라 그의 미출간 원고인 ≪에티카≫와 그의 다른 글들이 담긴 책상이 봉인되어 비밀리에 출판업자에게 전달되었다. 스피노자의 유고집 출간은 극도로 위험한 프로젝트였다.

 

편집자들은 암스테르담의 운하 주변에 늘어선 주택가 골방 여러 곳에서 각자 열성적으로 작업에 임했다. 그들은 법을 어기고 있었고, 또한 신도 거스르고 있었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어도, 최소한 공인된 바티칸 교황청에 대해서는 그랬다. 스피노자가 죽고 얼마 안 있어, 바티칸의 교황 비서인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Francesco Barberini) 추기경은 그러한 출판 시도가 있다는 소문을 접하고, 로마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바티칸 위원회는 그러한 모반 음모를 진압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네덜란드 가톨릭교회의 대목(代牧)에게 경고를 보냈다. 그러자 대목은 그 사건을 암스테르담의 선임 사제에게 할당했으며, 이어서 그 선임 사제가 모든 종파에 전갈을 보내 자신의 수사대에 동료 신앙 조사관들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1677년이 며칠 안 남은 시점에 스피노자의《유고 전집》이 마침내 암스테르담의 지하 인쇄소로부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책은 과거 《신학정치론》이 출간된 이후 꺼지지 않고 남아 있던 비난과 검열의 불길을 다시 뜨겁게 불러일으켰다. 유고집 출간은 독일 하노버에 있는 한 철학자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 안에서 위험한 무신론자에게 자신이 보낸 호의적인 편지를 확인한 라이프니츠였다.

 

옴니마니아, 혹은 다중 강박증에 걸린 남자

 

 계몽주의 철학자 드니 디드로는 “누구든 자신의 조그만 재능을 라이프니츠의 재능과 비교해본 사람이라면, 자신의 책들을 집어던지고 깊고 어두침침한 모퉁이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며 그의 재능을 칭송했다. 반대로 볼테르는 철학적 소설 《캉디드》에서 라이프니츠를 극단적인 낙천가로 조롱했다. 버트런드 러셀은 그를 ‘싸구려 인기’를 추구하느라 자신의 천재성을 비천하게 만든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조롱과 찬사를 동시에 받는 라이프니츠는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을까.

 

라이프치히의 신동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1646년 7월 1일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라이프치히대학 도덕철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창 시절에 스피노자의 별이 환히 빛났던 것만큼이나 고트프리트의 별 또한 찬란하게 빛났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제각기 매우 상이한 유형의 신동이었다. 학교에서 스피노자는 내성적이고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눈에서 느껴지는 어떤 번득임과 이리저리 오가다 무심결에 내뱉는 날카로운 언변이 없었더라면 그는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았을 그런 유형의 천재 소년이었다.” 반면에 라이프니츠는 “자신이 지닌 최고의 지능이 다른 이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축소하려는 성향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점은 어린 시절에는 물론이고 훗날에도 변함없었다.

 

열두 살이 되자 그는 라틴어에 능통해졌으며, 그리스어를“더듬거리며 말했다.”자신이 나중에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상당히 풍부한 임기응변과 교묘한 솜씨를 발휘하여” 라틴어로 운문을 지을 줄 알았으며, 열세 살 때는 단 3일이라는 기간을 통보받고 그 안에 완벽한 300행의 6보격 운율시를 준비할 수 있을 정도였다. …… 자연스레, 그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 푹 빠져 있었다. 그가 열세 살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철학에 관해 적은 주석 때문에“선생님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그는 즐겁게 회상했다.

 

1666년에 고트프리트는 라이프치히대학에 자신의 박사 학위를 청구했다. 그 학위는 그의 20년 생애가 일관되게 지향해 온 결정적인 순간이자, 작고한 유명 교수의 아들로서 그에 걸맞게 지역 학문 공동체 내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는 법학과 수학에서 자신의 선구적인 연구 작업이 적절한 요구 조건을 충족시켰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청구는 거절되었다. 그 일은 매우 고통스러운 좌절이었다. 그리고 그의 연구에 담긴 개척자적인 의의에 비추어보면 엄청나게 불공정한 결과였다. 그 길로 라이프니츠는 바로 고향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세상을 위한 철학을 꿈꾼 신의 변호인


 스피노자를 이해하는 데 이중으로 추방된 망명자였다는 점이 중요하다면, 라이프니츠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가 태어난 곳이 30년 전쟁의 참화를 입은 독일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유럽을 휩쓴 종교 전쟁인 30년 전쟁으로 독일 인구는 2100만 명에서 1300만 명으로 급감했다. 그것은 20세기의 세계대전들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치를 능가하는 파괴력이었다. 평화를 갈망했던 라이프니츠는 모든 사상의 위대한 중재자, 신의 변호인이 되고자 하였다. 30년 전쟁이 낳은 아이로서 그는 오로지 평화만이 지속적인 지성의 번영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1670년부터 마인츠 선제후의 추밀고문관으로 일하게 된 라이프니츠는 유럽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자신이 세운 원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국가 건설 계획이었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스피노자와는 달리 개인적인 프로그램이 아닌 정치적인 프로그램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의 정치학은 다음의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신정(神政, theocracy)’이다. 라이프니츠의 작업에서 큰 동기가 되었던 구체적인 의제는 다름 아닌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가톨릭 교회를 재통합하는 일이었다. 한 논평자가 적절하게 언급했듯이, 좀 더 총체적인 그의 목표는 ‘현세의 종교 기구’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가 꿈꾼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사람이 단일한 ‘기독교 공화국’안에서 하나의 교회 아래 통합될 것이다. 

 

스피노자 못지않게 라이프니츠 역시 철학적인 명예를 얻기 위해 열심이었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지하 혁명 세력의 지도자들에게 붙게 되는 종류의 명성을 추구한 반면, 라이프니츠는 훨씬 더 공공연한 형태의 특권을 추구했다. 그는 뻔뻔하게도 스피노자가 경멸했던 그 모든 것들을 갈망했다. 직함, 상금, 봉급, 정년 보장. 한 논평자가 언급한 바와 같이 “정말로 대단한 것은 돋보이고 싶어 하는 그의 욕망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명성을 디딤돌로 삼지 않았다면, 라이프니츠는 결코 인류의 공공 복리에 공헌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라이프니츠의 마음속에서 자기 자신의 ‘미래의 안전’은 때로는 인류의 공공 복리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만물을 향한 열정


스피노자가 전형적으로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었다면, 라이프니츠는 정반대로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벌이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라이프니츠는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을 보이는 ‘옴니마니아(omnimania)’ 성향을 보였고, 계획 세우기의 신봉자였다. 그는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다중 작업자의 한 명이자, 많은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기의 대가로 인정받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끊임없이 세우는 다양한 계획들은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경우 또한 많았다.

 

라이프니츠가 다방면의 천재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마도 그는 근대사 최후의 위대한 천재일 것이다. 그 위대한 사상가에게 바치는 찬사에서 베르나르 퐁트넬은 “고대인들이 말 여덟 마리를 동시에 다룰 수 있었던 것처럼, 라이프니츠는 모든 분과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라이프니츠에게는 경이와 찬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끝을 모르는 정력, 만물을 향한 열정, 그리고 자기 생에 대한 거의 필사적인 사랑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한 어떤 무모함이 있었고, 어쩌면 진지함도 기묘하게 결여되어 있었다. 라이프니츠가 거둔 일생의 업적들이 어느 모로 보나 비상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운 계획들과 비교해보면 그 업적은 실제로 빈약한 결실이었다.

 

라이프니츠의 배는 결코 항구에 안착하지 못했다. 매우 부유한 사람으로 간주될 만한 직무와 직함과 자금을 축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멈추지 않고 기어코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안전을 찾아서 사람들을 쫓아다녔다. 라이프니츠에게 삶은 물질 세계의 침탈 행위에 맞서 싸우는 지속적인 투쟁이요, 존재 자체의 불안정성에 맞서 내뱉는 끝없는 불만의 표출이었다. 실제로 그는 스피노자가 11년 동안 생활비로 쓸 수 있는 돈을 1년 연봉으로 받으면서도 늘 더 많은 급여를 원했고, 하노버 궁정에서 일하면서도 파리나 런던으로 탈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지원서를 쓰고 명사들과 접촉했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근대적 사유의 탄생

 

 코페르니쿠스에서 갈릴레이로 이어지는 일련의 천문학적 발견과 뉴턴의 역학 등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하면서 17세기에 신과 종교의 권세는 급격히 쇠퇴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무너졌고, 인간이 신의 모든 피조물들 사이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는 특별한 존재라는 믿음도 의심받기에 이르렀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세계 무역의 확대로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 사회가 문명의 원천이라는 믿음에도 일찍이 금이 간 상태였다. 거기에 종교개혁 이후 당혹스러울 정도로 심화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 가속화된 경제 발전과 도시화, 통치 세력의 세속화가 더해지면서, ‘신의 존재’를 중심으로 유지되어 온 중세적 질서는 뿌리부터 흔들렸다.

 

‘천재의 세기’ 또는 ‘가장 사악한 시대’


후대 역사가들은 갈릴레이, 뉴턴, 데카르트, 홉스, 로크,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이 활약한 17세기를 ‘천재의 시대’로 부른다. 그러나 당시 세상의 판세를 읽을 줄 알던 사람들의 일반적인 의견은 그 시대가 대단히 사악하다는 것이었다. 17세기 삶의 풍요로우면서도 혼란스러운 풍경을 하나로 꿰뚫는 단 하나의 맥락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 시대가 하나의 과도기, 즉 중세의 신정(神政) 일치적인 질서가 근대의 세속적 질서에 막 자리를 내주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바로 그 전환기의 세계를 누구보다 먼저, 냉철하게 인식한 사람이었다. 저자는 스피노자를 근대 세계를 제대로 관찰한 최초의 인물이자, 근대성을 능동적으로 끌어안은 최초의 근대 사상가라고 평가한다.

 

스피노자는 근대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그 세계를 제대로 관찰한 최초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는 명백하게 근대적인 관점에서 오래된 철학의 문제들에 답해보고자 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근대 과학이 밝혀낸 우주에 어울리는 신(神) 개념을 자신의 철학 체계 안에서 제안한다. 그 우주는 오로지 자연법칙의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만 지배되며, 그 배후에 어떤 목적이나 설계가 존재하지 않는 그런 우주이다. 그는 우리가 자연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분쇄되고 난 후라면 과연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게 될지를 서술한다. 그는 낡은 신학이 신뢰를 잃어버린 시대에 어떻게 행복과 덕을 찾을 것인지 그 수단을 처방한다. 그리고 본래 파편화되어 있는 다양성의 사회에 적합한 자유롭고 민주적인 정부 체제를 주창한다. 스피노자의 입장은 ‘근대성(modernity)’에 적극적으로 반응한 최초의 원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주로 세속적인 자유주의와 결부시키고 있는 근대 세계를 긍정한 것이었다.

 

스피노자의 근대적 이성이 찾아낸 새로운 신


 스피노자는 전통적인 신 개념을 전제정치의 대들보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신학자들은 미신에 갇힌 군중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심판하고, 처벌하는, 무서운 신에 대한 믿음을 조장하는 것이고, 실제로 조직화된 종교란 조직화된 사기 집단에 불과하다. 스피노자가 이성의 인도에 따라 발견한 새로운 신은 자신을 섬기는 인간들을 어여삐 여기는 그런 신이 아니었다. 스피노자의 신은 ‘인격성’이 없다.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신은 잠을 자지도, 꿈을 꾸지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결정하지도, 판단하지도 않는다. 신은 개개인을 판단해서 그들을 천국이나 지옥으로 보내지 않는다. 스피노자의 신은 ‘자연(Natura)’이었다. 여기서 ‘자연’은 만물의 ‘본성’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신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한다. 인간은 돌멩이나 나무와 다를 것이 없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반드시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하고, 그리고 자연만이 참된 숭배의 대상이다.” 스피노자의 세계에서 인간은 돌과 나무와 고양이가 그렇듯이 그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자연이라는 단 하나의 왕국에 속해 있다. 이런 단순한 명제와 더불어 스피노자는 지난 2천 년 동안 종교와 철학의 심장부에 꽂혀 있던 말뚝을 뽑아내버렸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인간을 나머지 자연과는 별개의 존재로 간주해야 한다는 태도였다.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켰던 스피노자 특유의 겸손함은, 개개의 인간들이 광대한 자연의 활동 속에 단지 하루살이 같은 보잘것없는 신세에 처해 있다는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의 신 개념에 따르면, 행복의 문제 역시 신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와 개인의 책임이 된다. 스피노자의 세계에서 신은 인간의 관심사에 무심하다. 물론 신이 냉담해졌고 인간의 특권이 불확실해졌다는 사실을 스피노자 자신보다 더 뚜렷하게 자각하고 있던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행복은 스피노자의 최대 문젯거리였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철저하게 세속화된 이 세계에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도덕적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스피노자는 행복은 곧 자유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가장 깊은 본성에 따라서 행위할 때,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실현할” 때, 그런 결과가 뒤따른다. 불행하게도 우리 인간은 우리의 가장 깊은 본성에 따라서 행위하는 특권을 거의 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무지로 인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이 끌고 가는 대로 스스로를 방치해버리기 때문이다. 인류는 감정의 바다 위를 떠다니며 난타당하는 존재라고 그 철학자는 일갈한다. 우리는 희망과 공포, 기쁨과 절망, 사랑과 증오가 뒤범벅된 혼돈 속으로 내던져진 채, 닥치는 대로 아무 경로나 밟아 나가도록 강요받는다. 그리고 그 끝에 도달하게 될 단 하나의 확실한 종착지는 바로 궁극적인 불행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수동적으로 살 뿐이라고 스피노자는 결론내린다. 그러나 삶의 참된 의의는 능동적인 삶을 사는 데 있다.

 

스피노자는 인간에게 특별한 무엇이 있지는 않지만 특별해질 수 있는 방법은 있다고 생각했다. 스피노자는 그것을 가리켜 ‘마음의 삶’이라고 불렀다. 즉 사유하는 삶 속에서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서 철두철미 ‘마음의 삶’을 실천하려 했다.

 

수없이 많은 ‘모나드’들로 이루어진 세계


라이프니츠 또한 스피노자에 못지않은 혜안을 지니고 있었고, 야심의 크기 역시 결코 뒤지지 않았다. 라이프니츠 역시 근대적 사유의 핵심인 합리적 이성에 대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고, 그로 하여금 헤이그 여행길에 나서게 한 것도 바로 그 신념이었다. 그리고 스피노자와의 만남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라이프니츠가 근대의 도전들에 맞서 나름의 독창적이고도 대조적인 반응을 표출하게 된 것은 바로 스피노자를 만났던 사건의 직접적인 결과라 말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철학적인 저술에서 이성의 한계를 분석하는 것으로 신과 인간에 관한 오랜 생각들을 복원하겠다는 분명한 전략을 제시한다. 그는 근대성이 깨닫지 못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전부 다 자신이 찾아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기심을 초월하여 정의와 자비라는 목적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통합되는 근대 사회의 미래상을 제시한다.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 체계는 근대성에 대한 반동적 반응의 패러다임으로서, 오늘날 우리가 주로 종교적인 보수주의와 결부시키곤 하는 입장에 가깝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면에서 스피노자의 이론을 논박하고 이성의 힘으로 자신만의 형이상학 체계를 세우려 했다. 무엇보다 그는 스피노자의 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이며 합법칙적인 신을 신으로 부를 수 없다고 보았다. 라이프니츠는 지성과 의지를 지닌 가장 완벽한 존재로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의지와 선택권을 지닌 신이 우리 인간에게 유익한 것을 염두에 두고 모든 일을 행하며,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행복과 평온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보장하는 이론을 폈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이 세계에는 신이라는 단 하나의 실체만 존재한다는 스피노자의 이론에 맞서, 세계가 무수히 많은 실체 즉 ‘모나드’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스피노자는 신만이 유일한 실체이며 인간은 단지 실체의 한 양태일 뿐이라고 보았고, 그 결과 인간의 마음도 소멸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끌어내렸다. 이를 논박하기 위해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를 세운 것이다.

 

실재가 무한한 수의 모나드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은 몇 가지 깜짝 놀랄 귀결을 함축한다. 라이프니츠는 거리낌 없이 그러한 귀결을 끄집어낸다. 예를 들면, 실체인 모나드들은 전적으로 자족적이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모나드는 그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이 주장에 담긴 가장 중요한 암시는 모나드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전혀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모나드들이 상호작용을 한다면, 어떤 한 모나드가 다른 모나드의 본성을 바꿀 수도 있다고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으며, 그것은 곧 한 실체의 본성이 다른 어떤 실체의 행위에 의존한다는 주장을 암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주장은 실체의 정의상 허용될 수 없다. 따라서 모나드들은, 라이프니츠의 그 유명한 시적인 표현처럼 “창(窓)이 없다.”

 

스피노자의 부활, 라이프니츠의 재발견?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이른바 근대성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경험들에 대해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반응을 각기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간단히 말해, 근대적인 사유의 상당 부분은 1676년 11월 헤이그에서 만났던 그 두 철학자가 각자 표방한 양극단의 철학을 오가며 벌어진 방랑의 역사였다.

 

17세기의 위대한 그 두 명의 철학자들은 아직도 극복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근대적인 사유를 탄생시킨 쌍둥이 창시자들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스피노자와 그의 철학 속에 기록된 모든 것들에 대한 반응으로 정의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반응 가운데 홀란트에서 돌아온 후에 라이프니츠가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시킨 철학보다 더 강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몇 가지만 언급한다 하더라도, 교회와 국가의 분리, 문명의 충돌, 자연 선택 이론 등에 관한 오늘날의 논쟁들은 모두 1676년 11월에 시작된 논쟁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들이다. 오늘날에도, 헤이그에서 만났던 그 두 사람은 우리 모두가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그리고 암묵적으로는 이미 선택하고 있는 두 개의 선택지를 각기 대표하고 있다. 

 

한편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극단적으로 다르면서도 늘 인간 경험의 일부를 형성해 왔던 한 쌍의 철학적인 인물 유형을 각자 표방한다는 점에서 지금 우리의 삶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스피노자는 행복과 덕이 오로지 우리가 수중에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대변한다. 라이프니츠는 행복과 덕이 저 너머에 있는 무언가에 달려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을 대변한다. 스피노자는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심원한 선(善)에 조용히 주목할 것을 권고한다. 라이프니츠는 우리의 선한 작업들이 다른 사람들의 칭송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억제할 수 없는 갈망을 표현한다. 스피노자는 지금의 모습 그 자체로서 사물들의 총체를 긍정한다. 라이프니츠는 지금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우리 안의 한 단면과도 같다. 의심할 바 없이, 어느 누구나 이런 두 사람의 요소가 조금씩은 있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