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크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명상>을 읽었다.
루소는 허두에서 "어느 시기가 되면 오늘을 살다간 인간들이 나에게 보여준 평가와 행동을 새 사람들이 신중하게 검토하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간교를 파악하여 나의 참된 모습을 알아줄 것"이라며 미래와 미래 세대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피력한다.
장 자크 루소, 고독한 산책자의 명상
그러나 이내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요즘 새로운 반성을 거듭하여 세상 사람들의 심성을 개조시킨다는 것은 새로운 세대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가망없는 허구(虛構)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장 자크 루소, 고독한 산책자의 명상
루소가 하는 얘기는 요즘에도 여전히 와닿는다.
"능변한 인간들의 궤변에 언제까지 현혹당하고 있을 것인가. 그들이 남에게 그토록 강요하고 있는 그 사상의 알맹이는 자기들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편견이다. 그것을 무기삼아 남에게 억설을 퍼부으면서 그들이 확신하는 것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우칠 수 없게 하고 있다. 공연히 떠돌아다니는 붕당(朋黨)의 괴수에서 진리를 요구한들─. 나는 스스로를 위한 철학이 필요하다. 나의 확고한 행동 기준을 지금 찾아낸다 해도 늦지 않다. 나의 사상, 나의 원리를 바로 이 순간부터 확립해야겠다. 확신 그대로를 실천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자신의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낸 심경도 토로한다.
"일찍이 나는 내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냈었다. 그것이 나를 인간 윤리에서 벗어난 아비로 규탄해댈 꼬투리를 그들에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린 아이를 싫어하는 인간으로 나를 몰아붙이자는 결론을 내렸다.
한 가지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발판삼아 층계를 오르듯, 흰 것을 검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묘한 재주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세상에서 어린 아이가 모여 놀고 있는 것을 나보다 더 좋아할 사람이 없으리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낳은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냈다는 사실이 아비답지 못하다는 무정한 인간들도 있지만, 내가 고아원에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아이들은 그보다 더 비참한 운명의 골짜기로 빠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그토록 참담한 나의 운명을 그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두려웠다.
내가 그때 그 아이들의 장래에 무관심했다면 혼자서 아이들을 기를 수 없는 내 처지로선 그 아이들의 어머니나 외가 친척들 손에 맡겨야만 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그 아이들은 버릇없는 아이가 되었을 것이고 외가 친척들은 그 아이들을 방임한 나머지 고약한 괴물쯤으로 만들어 놓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의욕껏 배우면서 늙어간다."
"나는 의욕껏 배우면서 늙어간다."
노경에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같다.
덧>
의무방어전으로 쓰는 글이다. 자정 전에 올라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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