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과 메이지의 시대-무엇이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결정했나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1876년 강화도조약부터 1905년 을사조약까지 30년에 걸쳐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무수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 시기 두 나라를 통치한 동갑내기 고종과 메이지는 서세동점의 시대적 상황에서 각자의 개성과 인적·물적 조건, 대외 조건 등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국방 등에서 다양한 실험을 하며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맛보았다. 그렇게 고종과 메이지는 작게는 두 나라 사이의 역사를 연출했고 크게는 격동의 동북아 역사를 연출했다.


이 책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을 기점으로 하여, 고종과 메이지가 통치하던 시기의 한일 관계와 동북아 역사를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현존하는 사료의 분석과 인용을 통해, 조선과 일본 두 나라 앞에 산적한 수많은 문제와 그들이 직면한 다양한 사건을 조망한다. 더불어 고종과 메이지를 비롯하여 두 나라의 정국을 주도한 인물들이 그러한 사건과 문제를 어떻게 인식했으며, 해결을 위해 어떤 노력을 경주했는지 등을 세밀히 관찰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조선과 일본의 관계사이기도 하지만 두 나라의 특정한 시대를 함께 읽는 비교사이기도 하다. 


1863년 즉위한 고종, 그의 개인적인 경륜이나 대내외적인 조건은 1852년 동갑인 메이지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메이지보다 4년여 먼저 즉위했고 2년 먼저 혼인했기에 그만큼 국정이나 세상물정에 먼저 눈떴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863년 당시 조선의 국력이 바다 건너 일본보다 그렇게 많이 약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즉위 후 40여 년이 지난 후 고종은 동갑내기 메이지가 보낸 특사로부터 면전에서 ‘비전과 지도력이 부족한 황제’라는 의미를 담은 무례한 비유와 협박을 듣는 처지가 되었으며, 결국 망국의 왕이 되었다. 이에 저자는 그 원인을 고종의 개인적인 능력에 한정하지 않고 ‘전환기’라는 세계사적 흐름에서 조망한다. 


고종이 즉위하던 19세기 중반 동북아시아는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붕괴되고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논리가 투영된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과정에 있었다.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은 조선을 비껴가지 않았다. 중국조차 전환기적 혼란을 겪고 있던 시기, 고종은 늦게나마 변화의 흐름을 인식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자 부단한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지도력의 한계와 주변국들의 끊임없는 간섭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일본 역시 전환기 혼란을 겪었지만 극복 과정과 결과는 조선과 확연히 달랐다. 이 책에 담겨 있는 고종과 메이지의 성취와 좌절, 그 내밀한 과정은 전환기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읽는 여러 방편 중 하나다. 그리고 이는 이 책이 갖는 또 하나의 의의이기도 하다.


1867년 일본에서는 에도막부의 쇼군이 메이지에게 정치권력을 헌상한 대정봉환이 일어났다. 근대 일본 역사에 중요한 사건인 대정봉환 이후, 1868년의 메이지유신, 1869년의 판적봉환, 1871년의 폐번치현을 거치면서 800여 년간 지속되던 막부체제와 지방분권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이는 곧 막부 쇼군과 대마도주가 소멸하여 200여 년 이상 계속된 전통적인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종식되고, 전통적인 관계를 상징하는 ‘왜관’이 더는 그 역할을 하지 못함을 의미했다. 


하지만 조선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 중요성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조선과의 관계뿐 아니라 수백 년 동안 동북아시아 질서를 유지한 국제 관계를 대신할 새로운 질서의 재편을 모색할 때, 조선은 여전히 일본과의 외교 관계는 대마도주와 ‘왜관’을 거쳐야 하며, 동북아시아의 질서는 청나라 중심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은 1876년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 체결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가마쿠라막부 이래 에도막부까지 일본의 국방은 사무라이가 주력이었다. 그런 이유로 사무라이는 권력의 중추로서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의례적 기득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 메이지 정부가 근대화를 추진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사무라이의 전통적인 기득권은 위협을 받게 되었다. 


기득권 침해에 따른 사무라이의 동요와 반발은 1877년, 유신3걸 중 한 명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도하는 군사반란, 즉 ‘서남전쟁’으로 이어졌다. 메이지 정부는 1년 예산과 맞먹는 비용과 수많은 인적 희생을 치르고 군사반란을 진압했으며, 마지막 남은 반대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이후 사무라이는 더 이상 시대의 주역도 반항아도 될 수 없었다.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무엇이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결정했나고종과 메이지의 시대-무엇이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결정했나



고종은 1874년 생부 흥선대원군을 하야시키고 친정(親政)을 선포했지만, 여전히 흥선대원군과 권력투쟁을 계속했을 정도로 그의 통치권은 견고하지 않았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외국과의 통상을 준비하고 제도를 정비하는 등 다양한 개화정책을 추진했지만, 위정척사파라 불린 지방의 보수 유림뿐 아니라 정부 관료들에게조차 적극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 상황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고종과 개화파는 주저 없이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고,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걸 경계하던 청나라는 신속히 군대를 증원했다. 그렇게 임오군란은 진압되었지만 조선에서 청나라의 간섭은 그 어느 때보다 확대되었다. 고종과 개화파가 주체적인 힘으로 보수파를 극복하고 개화정책을 지속할 동력은 그때 이미 약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일본의 강압으로 보호조약이 체결된 1905년, 이른바 을사년은 우리 민족에게는 ‘목 놓아 통곡할’ 크나큰 상처이자 아픔의 해였다. 하지만 일본인들에게 을사년은, 러일전쟁의 승리와 보호조약의 체결로 ‘화의 근원이 두절되고 동양 평화가 확립’된 역사적으로 기념할 만한 해였다. 


이러한 한일 양국의 인식 차이를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다. 안중근에게 조국 독립을 부정하는 일본은 ‘적’이었고 동양 평화를 해치는 주범이었으며, 이토 히로부미는 그러한 적의 주요 인물로 민족의 ‘원흉’이었다. 


반면에 메이지나 이토 히로부미에게는 동양 평화를 위협한 주범은 일본이 아니라 오히려 대한제국이었다. 무능하고 나약한 대한제국이 서양의 침략을 초래했으며 동양 평화를 지키려면 서양의 침략을 막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약한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는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메이지와 이토 히로부미의 주장이었다. 


문제는 메이지와 이토 히로부미의 주장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본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으며, 나아가 근대사의 몰이해와 왜곡은 의도적으로 더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안중근’은 여전히 ‘투사’ 혹은 ‘의사(義士)’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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